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 1903~1926)

경상북도 문경 독립운동가 박열의사기념관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본인 여성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입니다.

그녀는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라났고, 1912년 9세 때에 충청북도 청주 고모 집에서 7년을 지냈습니다.

그녀는 이때 자신처럼 학대받는 피식민지한국인들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19년 직접 목격한 3.1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919년 있었던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해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재판기록』, 20쪽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에서 고학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2월 박열을 만나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에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인삼 행상을 하며, 박열과 함께 잡지를 발행하며 일본 사회에 한국인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4월 한국인과 일본인 무정부주의 운동가를 모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혹독하게 오해를 받고 있는 ‘불령선인’이 과연 앞뒤 가리지 않고 암살, 파괴, 음모를 도모하는 자인가 아니면 어디까지나 자유를 향한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인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 간행한 『뻔뻔스러운 조선인』 제1호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인을 불령선인으로 구분하여 차별과 박해를 했습니다.

1923년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일본 간토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혼란한 가운데 일본의 군인, 경찰, 자경단이 6천 명 넘는 한국인을 학살하였고, 일본 경찰은 한국인을 대량 검거하였는데, 평소 특별 감시하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도 체포한 것입니다.

한국인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찾던 일본 정부는 조사 중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폭탄입수계획이 알려지자 이들을 대역사범으로 기소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가네코 후미코에게 전향을 권하였지만, 천황제에 진심으로 저항하였던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나와 의연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였고,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자 만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 판결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26년 7월 23일 순국하였습니다. 형무소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던 그녀의 시신은 후세 다쓰지 등 동료들이 발굴하여 박열 가족에게 전하여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피식민지 한국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독립운동에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는 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가네코 후미코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