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인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한인을 선동함이 이어지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식민지화의 큰 걸림돌로 언급한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외국인은 누구일까요?

바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입니다.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1904년 3월 10일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 통신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영문판, 한글판으로 발행되었는데, 1907년 9월 발행 부수가 1만 부를 넘었습니다. 이는 당시 발행되던 신문 전체의 배가 넘는 부수였습니다.

베델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고,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 활동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은 사전 검열을 통해 폭도로 표현되었지만,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는 의병 활동을 사실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보도는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 호외로 보도했습니다.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 호외로 보도했습니다. 이를 일본의 <재팬 크로니클>이 보도하였고, 일본에 있는 많은 서양인들은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기록한 고종황제의 밀서를 보도했습니다.

1907년 1월 16일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트리뷴>에 실린 고종황제의 밀서를 크게 보도했습니다. 이를 통해 을사늑약에 동의하지 않는 황제의 뜻이 한국인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부이자,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기 위해 벌인 범국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거두는 총합소 역할을 하는 등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굳건히 항일 논조를 고수하자, 일제는 강력하게 탄압했습니다.

일제는 영국 정부에 베델의 추방을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베델은 두 차례 재판에 넘겨져 3주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습니다. 또한 총무 양기탁을 구속하여 베델의 명예를 훼손하고 신문 발행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베델은 허위 보도 언론을 고소하여 보상금도 받아내었지만, 1909년 5월 1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베델 유언

베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참석하였고, 운구 행렬에는 1,000여 명이 함께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인을 대변했던 베델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

 

반크 독립운동가 꿈 kkum.pr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