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앨더만 린튼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3월 1일, 남자와 여자 그리고 노인부터 어린애까지 많은 군중들이 수도 서울과 인구 30만이 되는 도시에서, 또 농촌 각지에서 거리로 나와 행진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 『애틀란타 저널』, 1919
이 글을 쓴 이는 미국인 윌리엄 앨더만 린튼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입니다.

윌리엄 앨더만 린튼은 1891년 2월, 미국 조지아 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나 1912년 조지아 공대를 졸업하고, 21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하여 3월 5일 군산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군산만세운동은 린튼이 교장으로 있는 영명학교가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습니다.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교사와 교인들을 만나며 군산만세운동이 계획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사일 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3월 5일 일제 경찰이 영명학교에 들이닥쳐 독립선언서를 빼앗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교사들과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를 본 교사들과 학생들은 당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일제 군인과 경찰은 비폭력 시위를 전개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고, 체포된 사람들을 가혹하게 고문했습니다. 군산 지역에서는 5월까지 총 2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부상 195명이 발생하였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영명학교 교장이었던 린튼은 군산만세운동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만세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교사들과 학생들을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1919년 5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린튼은 평신도 대회에 참석해서 일제의 잔학한 식민 통치와 한국인의 저항을 증언하였고, 애틀란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을 기고하며 한국의 3.1운동과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1921년 린튼은 한국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두 학교를 폐교하였고, 1940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선교와 교육에 헌신하였고 1956년 대전대학교(현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냈습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윌리엄 앨더만 앨더만 린튼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그의 한국 사랑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린튼가와 한국과은 특별한 인연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들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한국명 인휴), 1926 전라북도 군산 출생, 인천 상륙작전 참전, 아내 로이스 베티(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한국명 인애자)와 함께 한국 선교와 의료봉사활동
–아들 드와이트 린튼(Thomas Dwight Linton, 한국명 인도아), 전라북도 전주 출생, 한국 선교와 의료봉사활동, 호남신학대 학장 지냄
–손자 스티브 린튼(Stephen Winn Linton, 한국명 인세반), 대북 지원단체인 유진벨재단 회장
–손자 존 린튼((John Linton, 한국명 인요한), 전라북도 군산 출생,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 한국형 구급차 설계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그 소식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들과 평생을 함께한 윌리엄 앨더만 린튼은 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윌리엄 앨더만 린튼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