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10년간의 일본의 압제를 견디며 숨죽여 온 한민족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찰칵!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한 외국인이 촬영하여 세계에 알렸습니다.

바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입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영국 워릭셔 럭비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하여 토론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16년 11월 선교사이자 세브란스의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스코필드는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이갑성의 부탁으로 3.1운동 현장을 촬영했습니다. 그는 3.1운동에 대해 협력을 요청받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습니다.

 

“나는 늘 박사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인 것 같이 느껴왔소. 박사는 우리를 위한 천사였소”-이갑성

스코필드는 기꺼이 3.1운동 현장을 찾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한국인을 면회하고, 일본 고관들을 찾아가 한국인에 대한 고문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스코필드는 일제의 만행을 직접 조사해서 해외에 알렸습니다.

1919년 4월 제암리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제암리 학살은 일제가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와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 마을에 들어가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예배당에 모으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하고 31채의 가옥을 불태웠고, 인근 고주리 주민 6명도 학살했습니다.

스코필드는 소식을 들은 바로 다음 날 현장을 찾아 조사했습니다.

그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보고서는 1919년 5월 27일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에 보도되었고, 「수촌 만행보고서」는 1919년 7월 26일 미국의 장로회 기관지 『장로교 증인』에 실렸습니다.

스코필드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인을 도우며 일제의 악행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은 1919년 7월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었으며, 그해 8월 일본에서 열린 선교사 모임에선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고, 일본 총리를 만나 일제의 악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을 돕는 스코필드를 항상 감시하고 괴롭혔습니다.

1920년 3월 세브란스 근무 계약기간이 만료된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에서도 강연이나 기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을 응원했습니다.

1958년 스코필드는 국빈으로 초청되어 한국에 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한국에 머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고아를 돕고,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한국인들에게 3.1운동 역사와 그 정신을 전했습니다.

 

“1919년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에게 진 큰 부채를 부디 잊지 말라. 한 민족은 때로 항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며 그 혼까지 잃고 만다. 항거하지 않았다면 일종의 노예 상태를 쉽게 하거나 눈가림하게 했을 것이다. ”

3.1운동의 증인으로서 그 역사와 정신을 전하고, 한국을 사랑하여 끝까지 함께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