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쥔훼이
(杜君慧 1904~1981)

“나는 조선의 딸 입니다. 나는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장 우수한 조선의 자녀들로 더불어 20년 동안이나 일관하게 환란을 같이하고 생사를 같이하여 오고 있습니다.”- 「해외 조선부녀 동포들에게-혁명자 후원 사업을 하자」, 『독립』, 1945. 7. 11.

자신을 조선의 딸이라고 소개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20년 동안이나 함께했다고 말하는 이는 바로 중국인 두쥔훼이(杜君慧 1904~1981)입니다.

두쥔훼이는 1904년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태어나, 1924년 여학생으로는 최초로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두쥔훼이가 다녔던 중산대학은 당시 항일운동을 하는 많은 한인 청년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이자 항일운동의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김성숙*을 만났습니다.

 

*김성숙은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임.

1927년 12월 중국공산당의 광저우봉기가 실패하면서, 봉기에 참여한 많은 한인 청년들은 피살되었고 남은 한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두쥔훼이는 김성숙과 함께 중산대학 기숙사에 남아있는 한인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고 자신도 김성숙과 함께 상하이로 탈출했습니다.

두쥔훼이는 1929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1945년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을 때까지 항일운동에 함께했습니다.

두쥔훼이는 중국 문화계의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35년 12월 12일 중국 문화계 인사들과 일제의 중국 하북지역 침탈을 성토하는 「상하이문화계구국운동선언」을 발표하고 함께 서명하였으며, 상하이여성구국회가 설립되자 조직부장을 맡으며 중국 여성들의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두쥔훼이는 한국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두쥔훼이는 상하이를 떠나 우한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생활하였고, 그녀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전시고아원에서는 항일독립운동단체의 기관지를 편집하고 출판했습니다.

두쥔훼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일본군이 우한을 포위해오자 두쥔훼이는 충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남편 김성숙을 따라, 1943년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5월부터는 한국구제총회의 이사로 활동했습니다.

나는 늘 조선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여야 우리 조선부녀 동포들이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또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좀 더 잘 싸우고 좀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해외 조선부녀 동포들에게-혁명자 후원 사업을 하자」, 『독립』, 1945. 7. 11.

 두쥔훼이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자기의 일로, 한국인을 자기의 동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두쥔훼이에게 건군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보여준 두쥔훼이는 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두쥔훼이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