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이스 쇼

(George Lewis Shaw, 1880 ~ 1943)

피고인은 임시정부와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성질, 목적, 수단 등을 알고도…자기 소유의 주택과 기타 건조물을 빌려주고 관리에게 선박을 제공하여 상해와 안동 간의 왕래에 사용하게 하여…내란 예비행위를 방조했다-1924.3.12. 판결문

 

이 판결문의 주인공은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 ~ 1943)입니다.

조지 루이스 쇼는 1880년 중국 푸저우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07년 중국 안동현(오늘날 단둥시)에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1919년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하도록 지원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은 임시정부와 국내 각지의 통신 연락 기구로, 정보수집과 보고, 기밀문서 전달, 자금모집과 인물소개, 무기수송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쇼가 지원한 안동교통사무국은 국내로 진입하는 거점지역으로써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쇼는 자신의 선박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안전하게 이동시켰습니다.

국내와 상해로 오갔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했습니다.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서해안을 지나갈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배를 세울 것을 요구하나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서 4일 후 무사히 포동선창에 내렸다. -김구의 『백범일지』

쇼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 탄약, 문서 등을 운반했습니다. 또한 일제 관헌의 정보를 독립운동가들에게 미리 전달하여 피신하게 하였고, 독립운동자금을 자기 이름으로 수표를 발행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도 했습니다.

“의열단은 일본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폭탄은 단둥에 있는 영국 회사(이륭양행)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 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하이에 보냈다.’-『아리랑』, 님 웨일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돕는 쇼는 일제의 미움과 감시를 받았습니다.

1920년 7월 11일, 일본에서 오는 가족을 맞으러 신의주에 간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쇼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무장독립운동가들과 엮어서 내란죄로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런던 타임즈(London Times)』에 보도되는 등 국제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부담을 느낀 일제는 4개월 만에 쇼를 보석으로 석방했습니다.

석방 이후에도 쇼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1921년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하여 안동교통사무국을 회복시키려 힘썼고,

1923년 의열단이 국내 거사 계획을 추진할 때 이륭양행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1924년 임시정부 요원 박창열 등의 부탁으로 국내 진입용 권총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조지 루이스 쇼, 이륭양행 사무원 김문규에게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조지 루이스 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훈장이 전해지지 못하다가, 2012년 8월 손녀 마조리 허칭스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인종과 국가, 성별에 상관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마조리 허칭스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조지 루이스 쇼는 진정한 ‘한국의 친구’입니다.

 

여러분도 조지 루이스 쇼의 꿈을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을 변화시켜주세요.